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성북에서 만난 예술가 : 김광석, 김환기

재작년 가을, 나는 2년간의 휴학 뒤 복학을 했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뒤 그리 길게 휴학을 하고 돌아왔으니, 당연히 동기들이 학교에 남아 있을리 없었다. 게다가 원체 낯을 가리는지라 변변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뒤늦게 학교에 다니 자니, 어딘가 계면쩍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싶은 심정으로, 학과 수업은 하나도 듣지 않고 소설 수업만 내리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허전한 마음 탓에 해가 뜨면 잠을 자고, 오후 느지막히 손님처럼 학교에 들러 수업을 듣고 돌아오는 일상이었다.

그러던 와중 성북신나에서 마을미디어 사업을 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요지는, 어차피 심심할 텐데, 같이 돌아다니며 촬영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여하게 된 것이 성북신나의 마을미디어사업, ‘성북동 비둘기’ 영상 제작이었다. (‘성북동 비둘기’는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한 영상으로, 88올림픽 때 서울에 대량 방사된 비둘기들이 도심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있다. 아, 내가 한 것 이라고는 촬영현장을 함께 찾아다닌 것 밖에는 없다. -영상클립 참조 :  https://youtu.be/VTcXCgotMi8 )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번지 34호는 김광섭 시인이 성북동에 머물던 시절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고, 북정마을 아래 비둘기 조형물과 「성북동 비둘기」시가 적힌 작은 쉼터만이 남아있다. 나는 비둘기 쉼터에 놓인 운동기구에 올라타 몸을 흔들며, 쉼터 벽 시판에 새겨진 「성북동 비둘기」를 눈으로 좇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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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마을 아래 비둘기 쉼터>

성북동은 김광섭 시인이 뇌출혈로 인한 병세 악화를 겪고, 모친상을 치르는 등 굵직한 곡절을 지나온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시인은 주변의 일들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시인은 물론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로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문학 문제집에 실린 「저녁에」를 통해서 였다.

 

저녁에 / 김광섭 詩(1969년)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당시 이 시가 퍽이나 마음에 와 닿았던 이유는 분명 고등학생시절 제가 무엇이 될지도 모르고 움츠리고 있는 캄캄한 기분을 간직하고 시를 접했던 탓도 있겠지만, 시와 함께 실려 있는 작은 삽화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제목의 삽화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뜬금없게도, 식물의 세포였다. 메틸렌블루인지, 아세트산카민인지로 세포벽을 염색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실험을 얼마 전 생물시간에 한 탓이었다. 그래서 그림은 한 존재를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삽화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푸른 바탕이 밤 하늘 같기도 하고, 점 하나 하나가 별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게, 무수한 군상을 아주 멀리서 내려다보는 기분도 들었다. 칸칸이 가로막혀 있거나 더러는 번져 있는 점들을 하나의 화면으로 보자니, 아주 멀리서 존재들을 관망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 존재를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과, 멀리서 조망하는 것, 작은 것과 전체가 사실 모두 이어져 약동하고 있다는 발견은 내게 왠지 모를 위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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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김환기는 이러한 자신의 점화에 대해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그의 일기에 쓰고 있다. 무수한 생각을 하며 한점, 한점 새기듯 그려낸 이 그림은 사실,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김광섭 시인의 부고를 들은 뒤 그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 삼아 그려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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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김광섭 시인에게 보낸 편지>

 

김환기 화백과 김광섭 시인은 절친한 친구사이로,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둘은 이따금 서신을 주고 받으며 일상을 나눴다. 그래서 일까, 문제집에 실려 있던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와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두사람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던 나의 눈에도 두 작품이 서로 대화하는듯 하는 친근한 인상을 주었다.

먼 타국에서 오간 두 사람의 서신처럼, 한사람의 손끝에서 쓰여진 시가 다른 이의 손끝에서 작품으로 감응하는 것처럼, 진심이 담긴 글과 작품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으로 퍼져 나가, 오래도록 씨앗이 되어 진동한다.

 

[자료 인용 및 출처(링크)]

이재화

이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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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형 인간입니다.
이재화